도전
낯선 미국에서 1920년대에 대학을 졸업한 한국 청년이 있었습니다.
미시건 대학교를 졸업하고 청년은 어떻게 돈을 벌까 하다가 사업을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무엇을 팔아야 돈을 벌까? 그러던 어느날 마트에서 숙주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 저거다! 청년은 숙주를 팔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미국에서 왠 뜬금없시 숙주나물?
하지만 당시 중국계 미국인들은 숙주를 이용한 요리를 즐겨 먹곤했습니다.
기회
때마침 미국에서는 중국계 미국인을 포함한 아시아계 미국인들이 만두를 좋아하기 시작했고 아시아계뿐만 아니라 미국인들도 만두맛을 알아 조금씩 유명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 숙주를 한번 팔아보자! 그럼 나는 독특하게 유리병에 넣어 팔아야지 당시 숙주는 쉽게 상하는 식재료로 그 특성상 기존 미국에서 유통되던 숙주들은 신서도가 별로였습니다. 근데 우리 숙주의 신선도는 자신있다. 신선도를 확인 할 수 있는 유리병으로 가자! 청년은 만두의 속 재료인 숙주를 비닐이 아닌 유리병에 담아 팔기로 했습니다.
"숙주 사세요 고객님들 유리병 안에 숙주 신선함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진짜 맛있습니다."
위기
하지만 당시 대다수의 미국인들은 숙주나물에 대한 인지도가 부족했습니다. 그러던 중 1921년 디트로이트 번화가 한복판에 숙주를 실은 트럭이 전복되는 사고로 유리파편과 숙주 나물이 도심 한복판을 뒤덮었습니다.
다음날 이를 신문에서 <숙주나물 차량 교통사고로 도로를 덮어 한때 교통마비, 숙주는 만두의 불가결한재료>라는 제목으로 기사가 났습니다.
이 신문의 기사와 사진으로 인해 숙주를 모르던 사람들이 숙주를 판매하던 한국 출신의 젊은 사업가에 대해 알 수 있었습니다. 이날 사고 이후 이 청년 사업가의 숙주 사업은 날로 번창하였고, 많은 돈을 벌게 되었습니다. 이후 청년은 유리병 용기의 위험성을 생각해 안전한 통조림으로 대체하여 판매를 하였고 "La Choy"라는 식품회사를 만들어 본격적으로 숙주통조림을 판매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식품회사는 성장을 거듭하여 아직까지도 미국 시장 내 동양권 식품시장의 40%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좋지 않았던 사건으로 인해 미국내 인지도를 높이게 되었고 그 후 이 젊은 사업가는 미국의 사업체와 재산을 정리한후 한국으로 돌아와 1926년 종로에 유한양행이라는 제약회사를 설립합니다. 이것이 유명한 유한양행 유일한 박사의 에피소드입니다.
"숙주 트럭 전복 사고가 노이즈 마케팅 효과를 내었다 하는 의견도 있지만 사고는 우연히 발생한 것이고 다만 이를 적절한 홍보수단으로 이용을 했을 뿐"이라고 전해 집니다.